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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

오래전부터 생각했던 일이긴 했지만 금정산 아래에서 범어사로 가는 버스를 타면서도 특별한 기대감이나 설레임같은 것은 거의 없었다. (하긴 인도로 가던 날도 무덤덤했는데 하물며...ㅋ)
범어사에 처음 온 것은 아니었지만 하룻밤 묵을 생각으로 일주문을 지나니 느낌이 좀 달랐다. 사천문을 지나고 대웅전 앞마당도 지나, 일정 시작 시간보다 약간 늦었으므로 빠른 걸음으로... 범어사 깊숙이 들어앉은 휴휴정사로 찾아갔다.

다행히 아직 도착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고, 나도 법복을 받아 갈아입고 큰 방에 앉았다.

웅산스님으로부터 사찰예절을 배우는 것으로 일정이 시작되었다.
단전에 두 손을 모으는 '차수'라든지, '합장' '반배' '고두배' 등의 예절과,
예식을 할 때 부르는 기본적인 노래 - '삼귀의', '사홍서원'을 배웠고,
템플스테이의 시작을 알리는 '입재식'을 치뤘다.

기분이 묘했다. 모든 것들이 생소했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편안해지는 느낌이었다.
종교 자체가 주는 마음의 평온함인건지, 불교가 내게 그리 낯선 종교는 아니기 때문인건지...
아니면, 한국의 전통문화와 밀접한 종교라서 그런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첫날 저녁에는 가장 궁금하기도 하고 기대되기도 했던 발우공양.
각자의 발우(밥 그릇) 셋트(?)를 받았다. 가장 큰 뚜껑을 여니까 차례대로 작은 크기의 발우가 세 개 더 들어있었고, 수저가 들어있는 천주머니와 행주가 한묶음으로 된 셋트였다.
먼저 스님으로부터 발우공양에 대해 배운 후, 공양간의 큰 방에 다른 참가자들과 두 줄로 앉아 발우공양을 했다.
언젠가 TV에서 보았던, 각자의 빈 밥그릇을 물로 닦아내어 밥 한 톨, 고춧가루 한 조각 남기지 않던 스님들의 모습. 그 땐 그저 신기해보였을 뿐이었는데, 밥먹는 행위와 시간도 '수행'이라고 스님께서 이야기해주셨다. 발우(음식 그릇)를 받아서 내 앞에 펼치고 음식을 공양받을 때까지 행동거지 하나 하나 내가 나를 들여다보아야 한다고.
밥 발우, 국 발우, 찬 발우 그리고 청수 발우에 조심스럽게 음식을 받고, 조용히 음식을 꼭 꼭 씹어먹으며 나도 역시 그 수행의 의미를 되새겨보려했으나...

그건 딱 세번째 숟갈까지만이었다.
원체 밥 먹는 속도가 느린지라 밥을 꽤 조금 퍼담았는데도 다른 사람들 속도 맞추느라 결국 허겁지겁 먹게 됐다-_-
(그 와중에, 나 같은 애는 군대가면 어떨까, 뭐 이런 생각이...;) 그래도 밥과 반찬은 최고!ㅋ

음식을 다 먹은 후에는 발우를 닦는다. 청수발우에 담았던 물을 몇 숟갈 발우에 옮겨담고, 남겨놓은 단무지 한 조각으로 차례차례 발우를 닦는다. 한번 닦은 후에 다른 발우에 옮겨담고 찬 발우에 옮겨담은 후 마신다. 물론 그 물에는 깨나 고춧가루, 참기름이 두둥실~ 허나 어떤가, 어차피 내 입으로 들어갈 것들이었으니.
그리고 또 청수를 담아 또 닦고, 닦고, 옮겨 담아 마시고... 단무지는 입으로 쏙~

신기하게도 나중엔 정말 깨끗해졌다. 마지막엔 발우와 함께 주어진 행주로 물기를 닦는다. 
한 자리에 앉아 밥을 먹고 각자 자기 몫의 '설겆이'까지 마친 셈이다. 남은 것은, 세제거품도, 음식찌꺼기도 없다.
마지막으로 남은 물('태수'라고 한다) 뿐이다. 물론 이런 행위가 일상인 스님들이라면 마지막에 모아놓은 태수 통이 맑은 물 뿐이겠지만 이 모든 것이 처음(처음이 아닌 분들도 있었겠지만)인 템플스테이 참가자들은 태수 통이 아주 맑지만은 않았다ㅎㅎ (엄한 스님은 태수가 맑지 않으면 다시 나눠마시게 하신단다^^;)

내 발우를 직접 닦아야 할 생각을 하니 음식을 담을 때도 신중하게, 먹을 때도 조심조심 먹게 되었다. 물론, 좋은 사람들과 함께 밥 먹으면서 대화를 나누는 것이야말로 큰 즐거움이지만 이런 방식도 참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친환경적인가. 욕심을 부릴 수도 없고 군더더기도 없는. 



저녁 예불을 앞둔 시각, 법당 앞 마당에 섰다.
겨울이라 해가 짧은데 산사의 해는 더욱 짧고 바람도 더욱 찼다.

법당 옆의 누각에 스님 두 분이 올라가시더니, 곧,
두궁두궁.... 커다란 법고(法鼓)를 치신다. 한참 이어지다가 또 다른 스님이 바로 옆에 있던 목어(木魚)를 치신다.
저녁예불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리라.
법당 앞 마당은 물론 범어사 전체를 환히 밝히는 소원을 담은 연등불, 북 소리, 그리고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 소리.
발도 시리고 손도 시렸지만 마음이 환하게 맑아지는 것 같았다.

그 때 정말 오길 잘 했다고 느낀 것 같다. 
다시 이런 풍경 속에 서서 바람을 맞을 수 있을까, 싶었으니까.
범어사 전체가 이렇게 환하게 연등으로 밝혀지는 날은 1년에 몇 일이 채 되지 않는다는 얘기를 들으니 더더욱.




낯선 잠자리에서 은근히 잠을 설치는 터라, 좀 걱정했었는데...
10시에 눕자마자 잠이 든 후, 기상시간인 새벽3시, 누군가 방의 불을 켰을 때 눈을 떴다. 한 번도 깨지 않고 기분 좋게 푹 잔 거다.
(범어사 터가 풍수지리학적으로 명당이라던데 그런 영향도 있었던걸까.ㅎㅎ)

새벽 예불이 끝난 후, 참선 시간이 있었다.
참선이라... 내게는 딴세상의 언어같은 두 글자.
내 인생에 참선이라는 단어는 영 인연이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템플스테이에서 '참선'을 하게 되었다.
아니 시도해보았다고 해야겠지.
오랫동안 OO산, @@산에서 갈고닦으셨을 것 같은 포스가 느껴지는 스님이 오셔서 명상의 가장 기본 중의 기본이라는 호흡법을 가르쳐주셨다. 그것을 시작으로 2시간동안(무려 새벽4시부터 6시까지!) 명상 ... 흔히 떠올리는 것처럼 가부좌를 하고 부동자세로 일관하는 그런 명상은 아니었다. (그랬다면 백발백중 잠들었을 것임;;) 요가와 같은 동작도 배우고, 일어나 걷기도 하면서... 마음을 비우고, 잡념을 없애려고... 애써봤다.^^;

쉽지는 않았다. 명상을 통해서 내가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
이 시간 이후에는 아주 미미하게나마 달라져 있을 내 모습을 기대했던 것 같다. 그래서 스님이 말씀하시는대로
마음을 비우고 내가 나를 투명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랐다. 구체적인 목표를 갖고 템플스테이에 참여한 건 아니었지만 나를 조용히 돌아볼 시간이 필요했었다. 분명히 두 시간동안 내 정신은 또렷또렷했고 잡념도 (거의) 없었다.  그런데 -  난 뭘했지? (멍때렸나...?-_-)
그 시간 이후로 얻은 건, 나의 일상에 명상이 필요하다고 깨달았다는 것. 여러차례 시도하다 보면 내게 이로운 시간이 될 거라고 느꼈다. 사람들이 왜 명상을 하는지, 그게 왜 좋은지,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



아침, 암자순례 시간. 계명암에서. 비록 머리는 서서히 떡져가고있었지만 기분은 좋았다^^




2

종종 종교가 있냐는 질문을 받곤한다. 지독한 냉담자이긴 해도 자기소개서의 종교란에는 어김없이 천주교를 써넣으며(좀 찔리긴 해도 그렇게 된다-_-) 미리암이라는 세례명도 있다고 하면, 대개 질문을 한 사람은 좀 놀라는 반응을 보인다. 내가 생각해봐도, 나는 아무리 봐도 무신론자(처럼 보인다).ㅋㅋ

그러나 나는 절간의 고즈넉함과 담백하고 소박한 절밥을 좋아한다.
바람에 흔들리는 아련한 풍경 소리를 사랑한다.
소백산 굽이굽이를 앞마당 삼은 부석사 무량수전도.

아무튼 불교는 꾸준히 내게 관심의 대상이었다. 불교동아리에 가입한다거나 불교서적을 줄줄이 독파할 만큼의ㅋ 강력함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대학생 시절에 불교문화 교양수업을 일부러 듣는다거나, 서점에 들렀다가 사원건축에 대한 책을 살 정도는 되었다. (대학원에 와서 불교학생회에 가입할까 잠시 고려했던 적도 있었다)
언젠가 템플스테이에 대해 알게 되었고 참여해보고싶다는 막연한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어쩌다보니 이번 달에 드디어 인터넷으로 참가신청을 하고 회비를 입금한 후 우리집에서는 꽤 먼 거리인 범어사까지 가는데까지 의지가 발동했다. 

생각해보면, 불교가 내게 낯설지 않은 이유는 또 있다. 
친가는 천주교이지만 외가는, 아니 외할머니는 생전에 절에 다니셨다. 종종 외갓집에 무당이 와서 굿을 할 때도 있었지만;; 어릴적 외갓집에서 목탁을 두드렸던 기억도 있고, 외할머니의 염주도 생각난다. 외할머니 사십구제 때 친척들과 어느 절에 가서 할머니 위패를 모셨고 밥을 먹었다.

이번 템플스테이에서 처음으로 예불에 참여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내가 생전 처음 참여한 예불은, 지난 겨울 인도의 맥그로드 간지에서다. 로사(티벳 설날)날 아침에 남걀사원에서 예불에 참여, 아니 '구경'을 했었다. 고소한 밥과 버터차도 얻어마셨지ㅎㅎ 그곳에서 보았던 예불과 범어사의 예불은, 닮은 면도 있지만 상당히 다르다. 스님들이 머리를 빡빡 밀지 않았거나 불상이 없었다면, 같은 종교의 예식이라는 걸 알 수 없을지도. 

그래서인지 궁금해졌다.
인도에서 생긴 불교가 어떻게 인도차이나 반도를 지나 중국, 한반도까지 강력하게 전파되었을까,
티벳의 불교는 어떻게 독특한 색채를 띄게 되었을까,
왜 정작 인도에는 힌두교가 압도적일까. (하긴 우리나라는 기독교가 압도적...)
석가모니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계명암에서 단체사진~


덧붙임_
- 기회가 된다면 또 가고싶다. 범어사든, 또 다른 그 어느 절이든. 템플스테이가 내게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니까.
- 1박2일간 지내는 동안, 불교에 대한, 종교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으나, 그 얘긴 다음 기회에... (생각이 좀 정리된 후에...)
- 첨부된 사진은 템플스테이 참가자였던 김O린님께서 찍은 사진을 받은 것...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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