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월한 필력으로 이름이 알려진 응급의학과 전문의가 어제 실검에 올랐다. 그의 책을 읽어본 적은 없지만 칼럼이나 SNS를 통해 종종 접해왔고 막연한 호감을 갖고 있었다. 의사들 중 누군가가 어떤 방식으로든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의사들의 경험을 전달해 오해를 풀고 공감과 이해를 끌어내는 것이 다른 의료인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도 있고. 최근 있었던 강서구 PC방 살인사건 피해자의 담당의였던 그가 당시 환자를 치료했던 상황에 대해 아주 상세히 SNS에 올린 글을 읽었다. 상태가 심각했던 환자를 볼 때 느꼈던 당혹감과 분노와 함께. 그런데 그 설명이라는 것이 너무나 구체적이었다. 물론 문장력은 뛰어난 글이었다. 하지만 이내 불편함을 느꼈다. 이건 좀 아니다, 이러면 안되는거다 하는, 직감에 가까운...
지금이야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에 퇴근하는 삶을 살고 있지만, 인턴, 그리고 전공의 1년 차 때는 그야말로 당직을 '밥 먹듯이' 하며 지냈다(물론 4년 내내 당직이 많은 다른 과에 비하면 나은 형편이지만 말이다). 인턴 때는 매달 다른 과에서 근무하기 때문에 당직일수가 달마다 꽤 차이가 났지만, 전공의 1년 차 전반기 6개월 동안은 일주일 중 22시간을 제외하고 늘 당직이었다. 언제든 병동이나 응급실에서 걸려오는 콜을 받을 준비가 되어있어야 했다. 병동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았고, 병동 간호사들과 업무상 접촉할 일이 많았기 때문에 자연히 가까워졌다. 단순히 인사하고 업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넘어 농담을 주고받거나 사소한 것을 챙겨주기도 하는 간호사들도 있었다. 한동안 안 보이는 간호사가 있으면 무슨 일이 ..
2월 중순, 응급실 근무로 시작된 나의 인턴시절. 인턴 전반기 6개월을 보낸 병원은 응급실에 레지던트가 없었다. 인턴 다섯명과 스탭선생님들만 계셔서, 이제 막 의사가 된(심지어 아직 '의사면허증'을 받지도 않았을만큼 갓 의사가 된) 나같은 인턴들이 환자를 봐야했다. 기본적인 문진과 진찰을 하고, 의심되는 진단명에 따라 검사를 처방했다. 물론 때때로 환자들이 집에 가져갈 약을 처방하기도 했고. 심각한 부상을 입었거나, 기존의 만성질환이 악화되어 온 환자, 수시간 내에 응급수술이 필요한 환자 등 결코 간단하지 않은 문제로 응급실에 오는 환자들을 보는 건, 의학적 지식을 꽤 활용하면서 즐거움과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일이기도 하지만 생각대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경우엔 괴로운 스트레스이기도 했다. 응급실을 찾는..
벌써 두 달 전의 일이다. 진찰 대상자 명단의 사번을 보니 그는 이 자동차 공장에서 일한지 아직 만 3년이 되지 않았다. 명단에 나이는 나와있지 않았지만 재작년에 대학에 입학한 내 막내동생이 떠오를 만큼 앳된 얼굴이었다. 입사 이후 지금까지, 오른팔에 힘을 주고 어깨를 돌리며 자동차 도어에 웨자를 끼우는 작업만 해왔는데, 일하는 동안 팔과 어깨가 너무 아프다고 했다. 신체진찰을 해보니 관절이나 뼈의 문제, 근육의 심각한 손상보다는 반복작업에서 비롯된 근육통일 가능성이 높았다. "뭉쳐있는 근육을 풀어주려면 자주 스트레칭을 하셔야 돼요. 어깨에 무리가 가지 않는 작업을 하는게 가장 좋겠지만 이 일을 계속 하면서 통증을 예방하려면 장기적으로는 근력 운동을 하셔야합니다." 바로 내 앞에 앉아있는 그의 얼굴에 희..
이번 학기에 대학원에서 필수로 들어야했던 '공통교양' 같은 과목의 많은 부분이 내게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었다.(실은, 지난 학기도..-_-) 의학, 생명과학, 보건학 계열의 석사, 박사 과정생들을 강당에 모아놓고 하는 일종의 옴니버스 수업이라 그 내용을 의미있게 받아들이는 학생들의 그룹은 강의의 주제에 따라 날마다 다르게 나눠졌을 터였다. 나 역시도 여러번의 강의 가운데 내게 유용하겠다고 생각했던 건 많이 꼽아봐야 세번 정도였던 것 같다. 그 중, 연구자의 자세와 태도에 대한 수업이었던가.. 연구자에 대한 몇가지 팁/조언 중에서 연구노트를 쓰라는 내용이 있었다. 매일마다 매시간마다 이루어진 과정과 그에 따른 변화를 꼼꼼하게 기록하라는 것. 사례로 주어진 상황은 그야말로 '실험실'에서 행해지는 연구를 ..
"안녕하세요" 동행한 선생님 한 분은 10년만의 방문이라고 하셨다. 그 이후 여러 차례 생산라인이 바뀌었다는 걸 함께 간 모두가 알고 있었으니, 첫 방문인 나나 최선생님보다도 그 선생님은 더더욱 작업장을 둘러보고싶은 마음이 크셨을 것 같다. 진료 전에 작업장을 함께 둘러보면 좋았을텐데, 오후 세미나 일정때문에 시간이 빠듯했다. 공장 한 켠의 노동조합 사무실에서 임원(으로 생각되는) 분들과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대상자 명단을 배정받은 후, 바로 그 옆 건물의 2층으로 안내받았다. 회의실이나 교육실로 쓰였거나 쓰이고 있을 법한 낡은 방들이었다. 2층 복도 끝 마지막 방 문에는 '제4진료실 - 김OO선생님' 이라고 내 이름이 붙어있었다. (그 때는 깨닫지 못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진료실에 내 '이름'이 붙어있..
얼마전 새삼 깨닫게 된 한가지.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각종 물건들은 다양한 형태의 노동의 결과물이라는 것. 거기서 더 나아가, 그 생산 과정에서 분명 누군가는 그와 관련된 각종 유해인자에 노출되거나, 때로는 실제로 불건강을 경험한다는 사실이다. 많은 이들이 애용하는 아이폰도 그렇다. 아이폰의 성능과 디자인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애플사의 대표적 납품업체인 폭스콘사의 중국 공장의 젊은 노동자들이 과중한 업무와 부당한 대우에 시달리고, 적잖은 수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사실은 이미 꽤 알려진 내용이다. 아이폰 사용자 중 그런 사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아니, 알고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늘 일상에서 접하는, 좀 더 평범한 한가지를 예로 들어본다면, 책. 지난 달, ..
이미 두 달 전에 연말 분위기는 낼 대로 냈고 나름대로 새해를 맞아 몇 가지 다짐도 했건만, 이곳 병원에서 나는 여전히 2011년과 마찬가지로 전공의1년차. 3월이 되어야 비로소 새로운 열두달이 시작되는 셈이어서인지 아직 마음은2011년에 머물러 있는 느낌이다. 2011년, 내게 가장 중요한 일을 꼽으라면 직업환경의학과 전공의가 된 것이다. 이제 1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돌이켜보면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것에 헛웃음이 나오지만, 앞으로 길고 긴(?) 여정에서 제 역할을 찾고 그 몫을 다해내기 위해 아직 초보 의사인 내게 필요한 중요한 일들 중 하나는 노동보건 문제에 대한 관점을 올바르게 세워나가는 것. 노동보건 운동에 대한 고민을 나누고 의사로서 실천할 수 있는 조직을 찾아 한노보연의 일원이 된 ..
1년차가 된지 어느덧 한달반이나 지났다. 처음 얼마간은 학생시절에, 직접 이곳 의국 전화번호를 알아내어 전화 연락을 시도하다가 실패한 후 동아리 주소록에서 발견한 어느 선배에게 연락하고, 의국장 선생님과 닿은 후 교수님들께 직접 메일을 보내 성사된 일주일간의 실습, 그 때 '여기서 레지던트 수련을 받게되면 좋겠다'라고 지금껏 바래왔던 바로 그 곳, 그 병원의 1년차가 되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고도 신기하고 고마웠다. 물론 다른 것 없이 적극적인 지원동기만으로 1년차로 받아주신 교수님들과 선생님들께 감사하다. (2.5:1의 경쟁율 - 그저 제비뽑기나 사타리타기하듯 쉽게 새 사람을 들이진 않으셨을거라고 물론 믿고있다) 여느 산업의학과 전공의라면 업무량이 많아 퇴근시간이 늦어지거나 평일에 다하지 못한 일을 주말..
또 실수다. 재원환자가 많으면 많은대로, 또 이렇게 적어지면 적은대로. 어제 입원한 환자 chest PA를 미처 확인하지 않았다. 아니, 분명히 열어보긴 열어봤던 것 같은데 왜 그 확연한 pneumothorax를 보지 못했던걸까! 아아악- 특별히 호소하는 증상도 없었던 터라 그냥 무심코 지나쳐버렸나보다. 50%는 족히 되어보일만한 pneumo를-_- 결국 오늘 아침 예정되어있던 bronchoscopy는 취소되었다. 환자에게 폐를 끼친 셈이다. 그나마 그 분이 약간 늦은 아침식사라도 하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질까. 나도 어제 저녁에 그것 때문에 할일이 생겨서 외출도 포기하고 살짝 슬퍼하고 있었는데. 대부분의 레지던트들이 겪는 malpractice의 큰 부분은 자신이 처방한 검사의 결과를 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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