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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okie or doctor

진료실

갈매나무 2012. 6. 22. 21:42


"
안녕하세요"

 

동행한 선생님 한 분은 10년만의 방문이라고 하셨다. 그 이후 여러 차례 생산라인이 바뀌었다는 걸 함께 간 모두가 알고 있었으니, 첫 방문인 나나 최선생님보다도 그 선생님은 더더욱 작업장을 둘러보고싶은 마음이 크셨을 것 같다. 진료 전에 작업장을 함께 둘러보면 좋았을텐데, 오후 세미나 일정때문에 시간이 빠듯했다. 공장 한 켠의 노동조합 사무실에서 임원(으로 생각되는) 분들과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대상자 명단을 배정받은 후, 바로 그 옆 건물의 2층으로 안내받았다. 회의실이나 교육실로 쓰였거나 쓰이고 있을 법한 낡은 방들이었다. 2층 복도 끝 마지막 방 문에는 '4진료실 - OO선생님' 이라고 내 이름이 붙어있었다.

(그 때는 깨닫지 못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진료실에 내 '이름'이 붙어있었던 건 처음이다. 병원에서 전공의 외래는 '일반의사'라고만 표시해두니까.)

 

'4진료실'의 문을 여니, 맞은 편 벽쪽의 열린 창문 밖으로 정체모를 기계가 방안을 소음으로 채우며 돌아가고 있었다. 다행히 창문을 닫으니 꽤 조용해졌다. 테이블 몇개가 ㄷ자로 배치되어있는 건조한 방. 자주 쓰이는 공간 같지는 않았으나, 20명 정도는 여유있게 모일 수 있을만한 꽤 넓은 공간이다. 의자에 가방을 내려놓고 가운을 입었다. 종이차트와 펜을 꺼내고, 참고할 매뉴얼도 옆에 둔다. 이렇게 간단히 준비를 마치고는, 일어나서 문을 열고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들어오세요" 

 

그렇게 시작. 나에게 배정된 일곱 분 진료가 끝났을 때, 목이 약간 아파왔다. 중간에 생수 한 잔 겨우 마셨나. 게다가 거의 두시간 반이나 지나있었다. 허거덩-_- 

(아무래도 그 날 오후 우여곡절의 근원은 내가 아니었을까.)

 

전날밤 잠을 조금 자서 몸은 피곤한데다가, 다른 일로도 계속 신경쓰이던 날이었는데,

그 날의 진료로 이런저런 생각과 고민이 많아졌다. 그것들은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고...

 


지금의 전공을 택한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그 중 한가지는 '전문의가 되고 5년 후, 10년 후 또 그 이후에 내 모습이 어떨까?' 하는 물음에서 나왔다.

내과,소아과 등과 같은 '일반적인 임상과'를 택한다면 대략 처음 수년간은(5년 정도?) 힘들겠지만 재미있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이곳과 같은 3차 병원의 스탭으로 남지 않는 이상, 

국경없는 의사회 같은 활동을 한다든지, 보건복지부나 제약회사에 취직을 한다든지 등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일하는 시간 대부분을 네모난 진료실에서 어떤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환자들을 대하며 보내게 될 거다.

그렇게 남은 20-30년을 일한다는 거, 어떨까. 당연히 그렇게 할 수는 있겠지만, 어느 순간에는 더 이상 즐겁지 않게 될거고 그 다음부터는 기계적이고 수동적으로 환자를 대하는 내 모습을 보게 되지 않을까.


그래서, 일하는 모습이 다양할 수 있고 그래서 선택의 폭이 넓(을 거라고 생각한)은 지금의 전공을 택했다. (물론 앞서 이야기했지만 이건 여러가지 이유들 중 한가지이다)


공장 한켠 낡은 건물 2층의 건조한 회의실이 진료실이 될 수도 있다고 누가 생각할 수 있을까.

물론 이 뿐만이 아니다.

수시간 전점심식사로 분주했을 회사 1층의 구내 식당.

고용노동부 산하의 지역근로자지원센터의 어느 공간.

8시간 이상 일하려면 귀마개가 필수인 벽지공장의 작업장 내, 그나마 조용했던 비좁은 방... 등 

... 지금까지 1년 남짓 전공의 생활하면서 병원이 아닌 곳에서 노동자들을 만났던 '진료실'의 모습들이었다.  


학생이나 인턴 때 전공에 대해 고민하고 선택해야 했던 시기에는 구체적으로 그리지 못했던 미래의 모습에 조금씩 조금씩 다가가고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리고 지금의 침체도 이렇게 천천히 '극복'해갈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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