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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dinary scene

단단해진 마음

갈매나무 2017. 11. 1. 23:31


“아이가 잘못된 것 같네요…”

지난여름, 임신 21주 차에 접어들던 어느 날이었다. 아이가 얼마나 자랐을까 기대하며 초음파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 달 전 쉴 새 없이 움직이던 아이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화면을 보자마자 어떤 상황인지 단번에 알아챘지만, 임신을 종결해야 한다는 담당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전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너무나 뜻밖의 일이었다. 입원 준비를 하러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야 울음이 터져 나왔다.


예정일 무렵의 진통은 곧 아이를 만날 수 있다는 희망과 기쁨으로 얼마든지 견딜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예상대로라면 넉 달 후에나 겪게 될 일이었다. 만삭 때만큼 아프진 않을 거라고 들었지만, 그래도 이미 심장이 멈춰버린 아이를 보내기 위해 진통을 겪어야 하다니 무서웠다. 아이를 잃은 고통과 슬픔이 두 배, 세 배로 증폭되는 것 같았다. 역설적으로 그 괴로움에서 서둘러 벗어나기 위해 내 몸은 힘을 내야 했다. 다행히 하루 만에 아이는 잘 떠나주었다.


병원에 가기 전까지만 해도 제법 불룩해진 배를 보며 신기했는데, 하루 만에 다시 평평해진 배를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이틀이 지나자 젖을 물릴 아이는 없는데 젖이 나오기 시작했다. 흥건해진 옷을 갈아입으면서 눈물이 나왔다. 들뜬 마음에 미리 준비해두었던 배냇저고리와 우주복, 속싸개를 상자에 담아 붙박이장 깊숙이 넣었다. 몇 달간 그렇게도 마시고 싶던 시원한 맥주를 오랜만에 마셨지만, 생각보다 맛이 없었다.


몸은 기대보다 빠르게 컨디션을 회복했지만 슬픔은 생각보다 오래갔다. 길을 걷다가, 책을 읽다가, 멸치를 볶다가도 예고 없이 눈물이 차올랐다. 밤에 자다가도 여러 번 눈이 떠졌다. 마음이 무겁고 힘들어 캄캄한 터널을 지나고 있는 것 같은 기분. 예전에도 분명 경험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 터널이 영영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아 더 괴로웠는데, 이번엔 아니었다. 당장은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있지만, 하루하루 견디며 지내다 보면 어느샌가 다시 평온해질 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예전과는 달리 내 곁엔 변함없이 나를 보듬어주는 남편이 있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고통과 슬픔에서 어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감정을 덮어버리거나 억지로 잊으려 애쓰고 싶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런 감정을 생생하게 느끼면서 내 마음을 들여다보려 했다. 눈물이 날 때는 마음껏 울었고, 그런 마음에 대해 남편과 이야기하며 서로의 슬픔을 나눴다. 쉬는 동안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추슬렀다. 어느 정도 에너지를 회복한 후부터는 스스로 즐겁게 몰두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서 했다. 우쿨렐레를 연주하고, 빵과 쿠키를 구웠다. 다양한 책을 마음껏 읽었다. 한 달간의 유산휴가가 거의 끝나갈 무렵, 일상으로 돌아갈 준비가 됐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평일에 일하고 주말에 쉬는 예전의 일상으로 다시 안착했다.


여전히 가끔은 얼굴도 못 본채 보내야 했던 그 아이가 떠올라 코끝이 찡해지곤 하지만 그래도 요즘은 잘 지낸다. 물론 예상하지 못했던 시련이 언젠가 다시 닥칠지도 모른다. 인생에서 늘 좋은 일들만 있을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비 온 뒤 땅이 굳는다고 했던가, 여느 때보다 힘겨웠던 한 계절을 보내고 나니 내 마음도 전보다 단단해진 느낌이다. 그렇게 얻은 힘으로, 일상을 소박한 행복으로 채워가려고 늘 궁리한다. 다시 힘든 일을 겪더라도 전보다 조금은 수월하게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


*  유산 이후 몸과 마음의 회복 과정을 글로 남기고 싶었는데 미루다가, 모 월간지 12월 특집 주제에 내 이야기가 잘 맞아 이 글을 기고했다. 마감일에 보냈는데 이틀후 12월호에 실릴 거라는 연락을 받았다. 기분 좋았다. 원고가 실리면 선물을 주는 줄 알았는데 이달말쯤 고료가 입금될거라고 하니 더 좋다. ㅋㅋ 큰 돈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본업 이외의 뭔가 다른 일을 한 댓가로 돈을 받게된다는 사실이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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