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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dinary scene

이야기

갈매나무 2009. 4. 21. 23:58

"사악한 계모가 백설 공주를 독약으로 죽이려 했던 게 아니었어요?"
"넌 신문도 안 보니?  사악한 계모는 알리바이가 있었던 걸로 판명됐잖아."
"우리가 미리 알았어야 했어. 그 시간에 계모는 다른 사람을 독살할 음모를 꾸미고 있었어. 백만분의 일 확률이지. 한마디로 우리가 재수가 없었어."
이번에는 데이빗이 가던 길을 멈추었다.
"그러니까 아저씨들이 백설 공주를 죽이려고 했던 거였어요?"
"우린 그냥 잠이나 좀 재울 생각이었지."
......
"어쨌든 우리가 사과를 먹였어. 어적어적 잘도 먹더군. 우린 훌쩍휼쩍 엉엉 울고불고 난리를 쳤지. '불쌍한 백설 공주님! 공주님이 몹시 그립겠지만 어떻게든 살아야 하겠지요!' 하고 통곡하면서. 우리는 백설 공주를 침상에 눕혀놓고 꽃으로 장식했어. 어린 토끼들을 불러서 그 곁에서 울게 했지. 그런데 느닷없이 그 왕자라는 작자가 나타나서 키스를 해버린 거야. 사실 이 왕국에는 왕자가 없거든. 그런데 그자는 어느 날 갑자기 피 흘리는 말을 타고 나타났어. 그러더니 말에서 뛰어내려서 마치 토끼 굴을 발견한 사냥개처럼 백설 공주한테 달려들었어. 도대체 뭐하는 놈인지 모르겠어. 잠들어 있던 낯선 여자한테 키스를 퍼붓는 게 취미인 놈이었는지 원......"
"변태! 그런 놈은 감옥에 쳐 넣어야 해!"
3번 동지가 말했다.

-<잃어버린 것들의 책> 13장, 데이빗과 난쟁이들의 대화



이 부분을 읽으며 혼자서 얼마나 웃었던가. 키득키득. 이 장면이 이 소설에서 결정적인 계기가 되거나 중요한 실마리가 되지는 않는다. 주인공 데이빗이 긴(?) 여정 속에서 듣거나 경험하게 되는 숱한 이야기들 중 한 가지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재미있는 소설을 읽고 난 후에도 종종 떠올라 혼자서 키득거리게되는 부분이다. 백설공주에게 키스한 왕자를 변태로 만들다니...ㅋㅋ 사실 동화라는 틀을 벗어난다면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아닌가. (지나가던 중 모르는 어떤 여자에게 키스를 했으니까!)  게다가, 백설공주에게 독사과를 먹인 게 계모가 아니라 '착한 난쟁이들'이었다니. 유주얼 서스펙트 뺨치는 반전.


소설책에 이토록 빠져들어 읽은 게 얼마만이었는지 모르겠다.
시험을 며칠 앞두고 도서관에서 빌렸는데 공부하는 틈틈히 야금야금 몇장씩 읽다가 시험이 가까워오자 절반쯤 읽은 책을 멀찍이 밀어놓았다. 그러나 결국 시험 첫째날 저녁에 집에 가서 나머지를 몽땅 읽어버렸다...;;;  (물론 도저히 책을 읽을 수 없을만큼 절박한 그런 상황은 아니었다... 고 생각하고 있다.)

독서 취향도 바뀌는 모양이다. 어쩌면 당연한거다. 독서는 마음의 양식이라는 말이 있으니, 시간에 따라 식성이 변하듯, 마음의 '식성'도 그런가보다.

중학교 무렵까지는, 여느 아이들처럼, 고전을 주로 읽었고, 고등학생이 되면서는 남들과 조금씩 다른 '관심사'라는 것이 생겨나면서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같은 역사나 문화재에 관련된 책들을 즐겨 읽었다. 지금은 전혀 관심없는, 정치인이나 재계 인사들의 회고록(!)도 읽었다. (아빠 책장에 있던 그런 책을 읽는 나를 두고 부모님이 신기해하셨던 기억이...ㅋㅋ)

대학에 다닌 몇 년간 내가 백남학술정보관에서 검색해본 소설책이 몇 권이나 될까? 직접 대출해 읽은 책이야 말할 것도 없고. 아마 요 며칠 검색해본 것보다 적은 수일거다. 요즘은 재미있고 좋은 소설이 어떤게 있는지 인터넷으로 여기저기 찾아보게 되고, 읽고 싶은 책이 학교 도서관에 있는지 확인한 후 다이어리에 적어둔다. 습관처럼.
(다이어리에 책 목록 적어두는 건 이미 오래된 습관이긴 하지만.)

고등학교 이후, 요 얼마전까지는 작가의 '구조와 논리'에 관심이 있었다. 책을 쓴 사람은 어떤 생각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지가 궁금했고, 그의 논리를 나의 것과 비교해보거나 옳고 그름을 따져보는 것이 재미있었다. 또 한 권 한 권 읽어가며 곱씹어보는 그 순간 순간 즉시 시야가 넓어지는 느낌. 그런게 책을 읽는 주된 즐거움이었다. 그러한 류 외에는 미술에 대한 책 정도...
반면, 서점가에서 잘 팔린다는 소설책을 누군가 권해주거나 우리집 방바닥에 놓여진 그 책을 발견하고는 심심할 때 펼쳐보면, 절반을 채 읽지 못하고 책장을 덮기 일쑤였다. 그래서 언제부턴인가는 서점에 가도 소설 코너는 아예 처음부터 pass. 수필집이나 시집은 간간히 읽었지만.

왜 유독 소설읽기가 힘들었던걸까.
처음엔 서사 구조 자체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렇다기보다는, 소설 속의 이야기는 진짜가 아니라 마치 진짜처럼 지어낸 이야기이기 때문인 것 같다. 물론 실화를 바탕으로 쓰여진 소설도 있긴 하지만, 작가가 창조해낸 허구적 이야기라는 인식 자체가 소설에의 몰입을 방해했던 게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소설이 해리포터 시리즈다. 호그와트 마법학교니, 어둠의 세력이니, 현실성 0%의 허무맹랑한 이야기(그런데, 0%라고 이렇게 단언해도 되는걸까 싶기도 하다. 내가, 혹은 모든 평범한 지구인들은 알 수 없는 다른 세계가 있는지도 모르니까.^^;)는 오히려 몰입해서 읽기가 수월한 것 같다. 적어도 내게는.

아무튼, 요즘 나는 '이야기' 자체에 빠져들고 있다고나 할까.
어릴적 잠들기 전 엄마가 읽어주시던 이야기 책이나 친구가 들려주던 무서운 이야기에 그냥 빠졌던 것처럼,
어떤 분명한 결말이 있거나 뜻깊은 교훈이 있는 이야기가 굳이 아니더라도, 시간과 공간에 따라 흘러가는 그 이야기 자체에 구미가 당긴다.

얼마전 어떤 책에서, 소설가 김탁환씨가 왜 역사소설을 쓰는지에 대해 읽었는데 그 말이 너무 멋졌다.
그가 역사소설을 쓰는 이유는 '현실이 지리멸렬해서'이고, 한 권이 아니라 길게 쓰는 이유는,
'기억하는 것보다 망각하는 속도가 더 빠른게 인생이고 소설도 그런 소설을 쓰고 싶어서'라고 한다.
읽었던 것을 기억하기 위해 앞부분을 다시 찾아가야하는 그런 소설.
인생의 중요한 단면을 꿰뚫고, 이런 간단한 문장으로 그의 삶과 예술이 단번에 연결되는 사람.
이런 사람이야말로 읽고싶고 듣고싶은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고, 사람들을 빠져들게 할 수 있는게 아닐까 싶다.  

(이 글에서 어떤 일관성같은 것을 굳이 찾으려고 하지 마시기를.  내 글은 원래 그런 경우가 많으니까.^^;)







잃어버린 것들의 책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존 코널리 (폴라북스, 2008년)
상세보기
 

별 다섯개에 몇 개... 라고 매기긴 어렵고, 재미있는 이야기책이다.
데이빗이라는 소년이 겪게 되는 일들에 대한 이야이기이자, 그 일들을 통해 소년이 변화하고 성장해나가는 그런 이야기다. 더 이상 구체적인 이야기는 생략하도록 하겠다. 이야기의 재미를 반감시킬테니까.
이 이야기 속에는 또 여러 이야기들이 나온다. 주인공 데이빗이 누군가로부터 전해듣는 이야기, 혹은 직접 겪게 되는 이야기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명한 동화에서 모티브를 따 온 것들이 많다. 이 글 앞부분에 내가 인용한 부분이 그 중 한 예이기도 하고. 그렇다고 식상하지는 않다. 오히려 내겐 신선하게 다가왔다.
문득, 어릴적의 상상력이 심하게 바닥났다고 느끼거나, 요즘 따분한 일 뿐인 사람들에게 강추! 휴일이 따분한 사람이 읽어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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