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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의 결정적 내용이 상당 부분 포함되어있습니다.



어느 인터뷰에서, 자극적인 요소 없이도 재미있고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는 감독의 말이 기억에 남았다. 평소 즐겨 듣는 라디오 프로그램의 영화 소개 코너에서 ‘동어 반복과 자기복제’가 난무하는 요즘의 한국 영화계에서 반가운 영화라고 소개되기도 했다. 게다가 알고 보니 작년에 참 재밌게 보았던 영화 ‘우리들’을 만든 영화사의 작품이었던 것.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개봉 후 3일째 영화관에 갔다.


영화 ‘용순’은 여고생 용순의 2학년 여름을 담고 있다. 충청도의 어느 고등학교에 다니는 용순이 육상부에 들어가 육상대회 준비를 하게 되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용순은 육상부 담당인 젊은 체육 교사를 좋아하게 되고, 선생님과 비밀 연애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던 중 선생님에게 다른 여자가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갈등이 시작된다. 잔잔하고 애틋한 성장영화일 거라는 나의 예상과는 다르게 의심과 갈등, 그리고 쫄깃한 미행(!) 과정을 거치며 드디어 대망의 육상대회 날, 모든 갈등이 폭발하는 격렬한 클라이맥스를 맞는다.


역시 듣던 대로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마음에 쏙 드는 영화였다. 더운 여름날의 시원한 탄산수 같은 영화랄까. 진부하지 않았고, 유쾌하게 웃을 수 있었다. 나는 용순과 같은 10대를 어떻게 지나왔던가 잠시 돌아보며 오랜만에 아득한 기분을 느끼기도 했다.


그런데 영화를 함께 본 옆지기는 조금 다른 시각에서 평을 내놓았다. 그도 영화가 재밌었다고 했지만, 용순이 좋아했던 ‘체육’(용순과 친구들은 여느 고등학생들이 그렇게 하듯 각 과목의 이름으로 교사들을 지칭했다.)이 너무 불쌍하다고 했다.


체육 교사와 단둘이 술자리를 갖게 된 교감 선생은 곧 있을 육상대회에 대한 기대를 감추지 않는다. 부담으로 느껴질 만한 이야기들을 주저 없이 늘어놓으며, 육상대회 결과가 좋으면 정교사가 되는데 문제없을 거라는 언급도 한다. 2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젊은 계약직 교사인 그, 자신의 지도로 준비 중인 육상대회의 성패에 따라 안정적인 정교사가 될 수 있다! 육상부 학생들이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어야 하는 충분한, 아니 절박한 이유가 그에겐 있었던 것이다. 


한창 더운 여름 방학 기간에 육상대회 준비를 해야 하는 상황이라, 여름날 달리기 연습을 하는 것은 누구에게든 쉽지 않은 일이다. 어쩌면 학생들보다도 더 절박한 이유가 있음에도 그는 학생들을 강하게 다그치지 않는다. 칭찬해주고, 부드럽게 타이르고 격려하며 육상부를 이끌어간다. 아이스크림을 사 주고, 고개 들고 뛰라며 새 운동화를 사주기도 하면서. 

젊은 남자 선생님의 진심 어린 행동이 한창 예민한 여고생들에게는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을, 경험이 미천한 교사인 그로서는 아직 잘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보다는 계약직 교사 신분을 벗어나는 것이 그에게는 더 크게 와닿는 일이 아니었을까. 원래 부드러운 성품을 가진 사람일지도 모르지만, 그래서 더욱 육상부 학생들에게 잘해줄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 용순이 그에게 빠져든 것도 “너 잘하잖아. 너 뭐에 막 매달려 갖고 열심히 해 본 적 없지? 확신 갖고 하는 사람이 얼마나 돼. 그래도 고갠 들고 뛰자.”라고 다정하고 따뜻하게 말해주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무엇에 끈덕지게 매달려본 적 없던 용순이 처음으로 매달려본 것이 결국 달리기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그의 기대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어긋나버리긴 했지만 말이다.


영화의 마지막, 용순이 여름의 끝자락에서 다시 운동장을 달리는 장면. 

파란만장했던 그 여름을 지나며 한 단계 성장했음을 암시하는 용순의 나레이션과 함께 이야기는 끝난다. 체육 교사가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전혀 다뤄지지 않았지만, 기대했던 육상대회는 엉망이 된 데다가, 비밀 로맨스(?)까지 탄로 나버렸을 테니 그의 정규직 전환은 물 건너 갔을 거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영화가 끝나고, 체육 교사가 얼마나 억울했을지, 그가 느낀 계약직의 비애와 좌절에 관해 이야기하며 옆지기와 안타까움을 나눴다.




<일터> 2017.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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